가나안 여인의 믿음 | 허사라 | 2016-12-16 | |||
|
|||||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15:21~28 12월 14일 새벽설교말씀 하나님께서 구원의 교도부로 세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본 자손이라 칭했다. 이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증거된 말씀을 붙들고 로마의 식민지하에 학대아래 그들의 삶에 너무 고난이 오니까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했던 메시야를 고대하고 기다렸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는데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게 오셨다.비천하기 짝이 없고 학문도 없고 이런 그릇을 쓰고 오니까 자기들이 메시야로 받아 들이기가 편치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손인 유대인들이 배척하게 되여진다. 그들을 위하여 오셨는데 그들이 배척을 하니까 이방인 가운데로 가셔서 오늘 이 본문에는 두로와 시돈땅 이방인 땅에 주님이 들어가신다. 이방인 땅으로 들어 가시는데 본 자손은 주님을 만날 구원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배척함으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여지고 그들이 버린 예수님을 생각지도 못했던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 중에서도 보잘것 없는 여인이 구세주를 만나게 되여진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하니까 예수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시돈 땅과 두로 땅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이 가나안 여인의 아픔을 아셨다. 그냥 들어간것이 아니라 뜻없이 진행되는것이 없이 주님께서는 이미 가나안 여인을 만나주시기로 그 딸이 귀신들린것을 풀어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고백을 받으시기 위하여 들어가셨다 그런데 이 부르짖는 소리에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때에 주님이 말씀하지않는다고 제자들이 나서서 주님을 가르쳐서도 안되겠고 한 말씀도 하지 않는다고 가나안 여인이 이제 외면 당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침노하는 천국을 구원을 침노하는것을 포기해서도 안되는 이 두가지 시험대가 딱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 하시니까 23절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을 양육해 가는 동안에 제자들이 앞지르기를 잘한다. 늘 주님에게 그르치기를 좋아하고 앞질러서 지시를 하고 이러는 오류를 많이 범한다. 그럴때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슨 제안을 하더라도 4복음서를 다 보아도 제자들의 제안을 한번도 들어준적이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양육을 받으면서 땅에 속하여 있는 육체의 소욕들이 끊어져야 된다. 자기의 자아가 부서져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 들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구원의 세계를 열고 가시는 주님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원하는것은 주님이 막으시고 제자들이 원치않는 것은 주님이 하게 하여주시고 이랬던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구원의 세계를 열어가시는데 우리의 체질이 좋아하는것을 하나님이 안 시키신다. 우리가 체질이 부서지게 할려고 우리가 원치않는 환경가운데 원치 않는 일을 시키시면서 나를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깨트리시면서 구원의 세계를 열어가시고 성결을 입혀가시는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예수없이도 할수 있다 그런데 하난님이 원하시는 일은 나를 부시지 않고는 할수없는 일을 시켜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또 가르친다. 가르칠때마다 우리 한텐 뭐가 나오냐면 성가시게 하니까 저 여자를 빨리 보내소서 하면서 예수를 지시하는 것이다. 차르칠 때마다 우리에게는 뭐가 나오냐하면 율법적인 기준이 나온다. 분명히 말씀이 있고 말씀으로 구원의 세계를 열어가시는 말씀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님이라 하셨으니 말씀외에는 우리에게 가는 길이 없는줄로 믿는다. 그런데 말씀외에 우리의 소견을 너무 많이 내여놓는 것이다. 꼭 이렇게해야 합니까. 이 길 가야 됩니까 이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수없이 제안을 했듯이 우리도 수없이 이런 오류를 범하고 가는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도 아니하고 우리들의 수없는 소견이 주님의 구원의 세계에 받아들이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못 끊어내는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한 말씀도 아니하시고 두 사람 다 시험대에 달렸는데 시험대에서 자기 속성이 딱 드러나면서 정체가 드러났는데 여인은 그런 거절과 뭇빗권 행사하는거 내가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는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도 모른척 하는거 이거 정말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기분 나쁜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주님이시면 됩니다 간절하게 주님만이 우리 딸이 귀신들린것을 고쳐주실수 있습니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찌라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확신합이다. 이것은 어떤환경과 어떤 여건이 온다고해도 포기되지 아니하는 믿음이 확실한 믿음인줄 믿는다. 24절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중에 잃아버린 양에게 가서 거절 당했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보냄을 받으셨음에에도 부구하고 이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이 뭐라 하냐면 예. 맞습니다 . 주님이 거절해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또 아무 말도 않하시고 말도 안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여자가 쫓아가는 것이다. 25절 에 주님이 거절해도 .거절을 했다는것은 주님이 거절해도 주를 경배. 경외하는 이런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주여. 도우소서. 또 주여 하는것이다 주님을 세번이나 부르짖으면서 주님은 나의 구원주이십니다. 나는 주님이 나의 구원주이심을 확신합니다. 26절에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항상 자신을 상대에 맞게 표현을 핬다.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지만 병든자 에게는 의원이 쓸데 있다고 그러시면서 병든자에게는 당신이 이 땅에 의사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양떼에게는 내가 목자라고 이야기 하셨고 농부에게는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실 때에는 당신을 추수의 주인이라고 이야기를 하셨고 또 성결함을 입는 신부자격을 입는 자에게는 당신이 신랑주라고 이야기를 하셨고 이렇게 너무 묵은 포도주를 가지고 율법적인 구습에서 못 벗어난 자에게는 내가 새 포도주로 오셨다고 이야기 하셨고 또 이렇게 자기 기준 자아를 못 벗어내니까 새 천이라고 하시면서 세마포를 입으라고 이야기를 하셧고 또 요나의 표적을 보여달고 했을 때에는 요나의 행적을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신은 요나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 하셨고 또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실 때에는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났다고 이야기 하셧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여인에게 당신을 뭐라 하냐면 자녀의 떡으로 자신을 개시하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떡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자녀에게 먹힘이 되여서 오시는 권을 역사하시고 자녀들은 이 떡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런 천국에 합당한 자로서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주님이 여인을 개 취급했다. 개는 부정한것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상대로 이야기했다. 그랬을 때에 이 여인의 대답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가 먹습니다.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은 어떻게 오셨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으로 상위에 오셨다. 이들이 그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상 밑으로 던져 버리니까 이방인인 개들이 이 예수님을 먹고 구원의 세계를 이루었다는것을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이 여인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정체를 시인하고 인정하고 들어가니까 이 여자가 구원을 받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인이 깨달은것은 주님. 맞습니다. 정말 저는 이방인의 개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는 먹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가 개의 몫으로 상아래 있는것이 아닙니까 이러면서 고백을 하게 되여지는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내 주여. 도우소서 그러고 오직 하나 자기 딸이 귀신들린거 주님은 고쳐주실것을 이미 소문들어 알았고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개 취급을 해도 괜찮고 모욕을 줘도 괜찮고 구원을 위해서는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며 갔다는것. 이 여인은 주님 마음만 움직여서 긍휼함만 받을수 있다면 내가 어떤 취급을 받든지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를 향할수만 있다면 이거 하나 가지고 무엇이든지 못할 신앙고백이 없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모욕도 인정했다. 딸의 문제가 걸려있는데 내가 사함을 받느냐 안 받느냐 구원을 이루느냐 안 이루느냐 이 절박한 문제가 여기에 있는데 무슨 이면체면이 무슨 자존심이 무슨 인정중독이 여기에 개입되여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가 .복의 기회를 놓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주님 앞에 자신을 어떤 취급을 하더라도 인정하고 들어가서 응답받고마는 이 여인을 보고 주님이 큰 믿음이라 하였다. 가나안 여인은 배가 고파서 주님을 찾아와서 양식을 구했던것이 아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딸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는데 안수를 해주시고 능력으로 역사해줬으면 좋겠는데 병 고치는것 하고 상관없이 먹는 문제를 다루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걸렸거나 병이 오거나 이러면 병이 온 원인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는 병에. 환경적인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이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오셔서 나를 깨뜨리셔서 주님께 돌이키기를 원하시고 주님을 구원주로 내가 온전하게 신뢰하고 확신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내 죄를 볼 생각은 안하고 병을 고쳐달라고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는 이러기 때문에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할 때마다 애급의 종살이도 하게 하여주시고 앗수르도 붙이시고 블레셋도 붙이시고 노예 생활도 하게 하여주시고 이랬던것은 블레셋이 문제가 아니다. 앗수르가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회복이 되여지면 앗수르도 떠나가고 바벨론도 떠나갔다.오늘 우리가 믿음만 회복 되여지면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만 올라오면 회개하고 주님의 위치에 돌이키기만 하면 병도 떠나가고 환경의 모든 문제도 회복될줄 믿는다. 그런데 이 공식을 떠나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고 잠자고 있던 죽었던 믿음에서 살아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병만 고쳐달라고 매달리고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과 마음을 모르니까 해결이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보면서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병들었거나 문제가 있는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모르는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외적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하는것을 하나님 께서는 양식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치료 받게 하시는 것이다. 나를 통치 하시는 분이 어두움의 세력이 아니라 구원주이신 빛이신 그분이 되여지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이 나의 주인 되시고 구원의 확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만 서 있으면 언제 문제가 떠나갔는지 언제 병이 떠나갔는지 떠나가게 될줄 믿는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스로보네게 여자에게 뭐라 하시냐하면 니 딸의 귀신들린게 문제가 아니라 니 안에 내가 들어가는것이 문제다. 네가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것이 먼저야 내가 너안에 들어가서 너의 양식이 되고 너의 모든것이 되고 너의 인생이 되고 너의 생명이 되여지면 너로 말미암아 귀신도 떠나가게 되고 병도 떠나가게 되고 모든 문제가 떠나가게 되는것이지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구원의 문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오늘 뭐라 말씀하시냐면 우리에게도 암고치는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 한테는 내가 필요해 내가 너의 주인이 되고 너의 인생에 주권자가 되는게 필요해 이것 좀 인정해라 죽든지 살든지 모든것 주께 맡기고 주님의 인도하심따라 가겠다는 이 신앙고백 하나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나를 먹으라고 하신다. 말씀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이 말씀이 주님의 몸 한조각 한 조각을 던져 주시면서 이것이 내 살이고 이것이 내 몸이니 이걸 받아 먹어라. 이러셨을때 이 말씀을 하나하나 먹을때마다 너무나 달고 오묘한것만 있는것이 아니다 육의 만족함이 있는게 아니다. 너무 쓰기도 하고 너무 싫기도 하고 이런데 정말로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고백하에 먹고. 먹고. 거절하지 아니하고 단순하게 순수하게 죽을지라도 감당하고 가다보니까 언제 우리 안에서 모든 문제가 풀려지고 예수의 사람이 되여져서 구원의 역사의 표징이 있는 인도자가 될줄 믿는다. 이런 축복 주실려고 우리에게 찾아 오신 분을 믿으셨으면 좋겠다. 스로보네게 여인에게 오늘 큰 믿음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큰 믿음은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각색 병과 모든 약한것을 고치시더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첫 시간도 주사고 둘째 시간도 주셨다면 일평생 우리느 주님께서 능치못함이 없는 능력으로 모든것을 다 고치셨지 못 고치신것이 없더라. 이 말씀을 딱 먹으시고 확신을 갖게 되면 어떤 수치와 어떤 모욕과 어떤 시련이 온다할 지라도 이 말씀 하나 붙들고 끝까지 요동하지 아니하고 가는 이 스로보게네 여인의 믿음만 있다면 큰 믿음으로 칭찬 받는 역사가 일어나면서 해결될줄 믿는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주님이 우리처럼 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신령적으로 부르는것과 삶속에서는 자기가 주인된것을 내려놓치 못하는 어떤 무시를 당해도 우리는 내가 주인이기때문에 무시를 못 받는다.. 거절못 당하고 업신여김을 못 당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조금 인정하지못해도 못 당하는것은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이 나의 온전한 주인이 되여주시면 내가 좀 무시당하면 어때. 내가 좀 거절당하면 어때. 주님이 아시면 되지.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나는 그 분의 종인데 이러는 그 믿음으로 심지어 모욕에 가까운 그말에도 절대로 주님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앞에 매달렸던 절대로 주님만을 신뢰했던 이런 믿음을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딸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결합을 하고나니까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 어느때에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어떤 자세로 주님앞에 기도하고 있는가 이번 기회에 다른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는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것을 여러분들 맛보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한다. 나는 내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기고 형제의 아픔을 끌어안고 부르짖고 간절하게 기도했더니 내 문제는 언제 해결해 주셨는지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는 간증거리가 우리들의 삶속에서 일어나기를 원한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