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자 | 김수강 | 2016-1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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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으면 끝이있듯이 언젠가는 육을 벗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지는데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것인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사데교회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로다 "하는 말씀으로 심판받은것 처럼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한것으로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영이 죽은 모습은 아닌가? 몸은 여전히 성전에서 찬양과 기도로 예배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행하심과 능력을 체험한자이고 스스로도 속을수 밖에 없는 믿음인것 같으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열심, 스스로 도취되어있는 충성봉사, 누가봐도 믿음인것 같고 살아있는 모습인것같으나 겉과속이 다른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마태복음15장7절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으로 살았다고 하지만 구원과 상관없는 행위에 밀착되어 옳고 그름으로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며 형식에 매여 자기본성하나도 내려놓지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향햐여 주님은 회칠한 믿음 죽은 신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자가 되기원하여 믿음의 연륜이 지남에 따라 변화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심령으로 말씀따라 조건따지지 아니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말씀의 움직임속에 촛점을 맞추고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연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에 습관,이전에방법을 쫒아간다면 영적 불구자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을 진단해보기를 원합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진자가 되기위하여 세상에 대해서 육신에 대해서 육체의 소욕에 대해서 나는 죽은자인가? 예수님을 만났는가? 확실한 천국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할수 있는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천국의 실제이신 주님께서 다스려주시는 평안함이 있는가? 겸손함이 있는가? 기쁨이 있는가? 이땅에 의지할것 없는 노숙자라 할지라도 자기의 심령가운데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도 감당치 못할 평안함이 있다면 천국의 주인공이고 되어지는것이고 이땅에 사는 동안 부러워할것도 두려워할것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교회가 처음부터 죽은것은 아니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자였고 받은 축복도 많았고 체험도 많았고 증거한것도 많았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났었고 치료받았고 죽었던 영혼도 살아났었고 잠에서도 깨어났었다. 그런데 오랜 믿음의 세월이 가는 동안에 더러운것이 붙어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받았다 들었다 하는 것으로 시간이 가다보니 알게 모르게 내 기준이 되어졌고 내방식이 되어졌고 세상의 모든 영들이 들어와서 자기식 자기 믿음으로 견고하게 진을 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된다. 인생의 연륜이 오래되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자 일수록 아름답지 못한것을 보게 되어 집니다. 직분이 있고 신앙생활 해왔고 주앞에 일했다는 경험이 있고 경륜이 있다는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 보기 드물다. 자기나름대로 해왔다는 율법적인 색깔이 분명해서 그 고집은 누구도 꺽을수없는 자기법을 가지고 있다. 아름답지 못한 믿음의 행적으로 이중적이고 불신자보다 못한 잘못된 신앙관이 아집이 되어져서 누구도 꺾을수 없는 병폐적인 영적 암적 세포가 자라나있다. 성령의 강력한 파워가 점점 식어져 가고 소멸되어져 가고 성령께서 거처할곳이 없어서 떠나실수 밖에 없는 내 영이 병든지도 모르도 점점 조금씩 죽어가는데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안에 암이 자라서 내 생명을 위협하는것을 모르듯이 내가 영적으로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것을 전혀 모르는 하나님만이 정확한 진단을 하시고 죽었다면 죽은것이다. 사단은 암같은 존재로 자각없이 점령하여서 우리에게 조금씩 먹혀들어온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아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우리는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써왔다. 이것이 암인것이다. 있지 말아야 될것이 있는것이다.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죽은자라는 것을 증명해주신다. 그러니 더럽고 추악한 인생가운데 회개외에는 죽은자가 살아날 방법이 없다. 우리의 죽은 심령에 강팍한 위치에서 내가 살아날 한가닥의 소망은 회개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얼마나 용서를 했고 섬기고 빛이되고 소금이 되어서 살아왔는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놓았는가? 이것을 물으신다. 나는 잘 살아왔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서 더러운 옷이 씻겨져서 흰옷을 입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된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어디서 들었는지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하라고 한다. 복음을 어떻게 듣고 구원을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해봐라. 이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영적 기억상실증에 걸린것이다. 첫사랑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된다. 어떻게 나를 하나님께서 바닷물에 물 한바가지 뜨듯이 그 바가지에 내가 들어와 구원을 받아서 집안에 노아가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되게 하시고 나를 구원시켜주셨는지, 하나님이 시작하셨는데 그 과정중에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주님이 나를 찾아와주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주셨고 영벌에 들어갈것에 건져내주셔서 천성으로 완전한 단계로 이끌어 주시는데 가는 도중에 주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재주로 여기까지 온것처럼 자만을 떨고 교만하기 짝이 없고 자기길을 열어간다. 이전에 아무리 내가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현재는 매너리즘에 빠져 내안에 감동도 없고 은혜도 있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데교회에게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어나서 주님의 영으로 들어오라고 오늘 우리를 일깨우신다. 구원을 시작으로 굳게 지켜야 된다. 구원을 시작으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면서 오직 예수님 말씀 붙들고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끝까지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원의 시작은 분명히 있었는데 지키지 못하고 구원이 끝인 사람이 있다. 오늘이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들었는지 받았는지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 되어져서 구원을 지켜나가는 것이 구원의 과정이다.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가야된다. 2백만명이 홍해를 건넜으나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은 두명밖에 못들어갔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셨는데 과정중에 다 잃어버렸다. 주님의 인도하심 받아 가지 아니하고 자기식대로 안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다 엎드려 죽은자가 됬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하셨는데 예수가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도 없이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방식대로 자기길 열고가는 것 이것이 죽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이전에 내게 얼마나 주님이 역사했고 어떤일을 행하게 하셨고 나를 어떻게 건져주셨고 이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주님께서 우리들을 만져주시고 어떻게 치료하시고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몇 명이 있다고 한다. 공동체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몇 명이다. 한두사람 때문에 교회전체가 좋게 평가되기도 하고 나쁘게 평가되기도 한다. 한 교회에 느끼는 이미지가 몇 명의 사람에게 달려있는데 몇 명의 대표자가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데교회는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말씀으로 회개하고 돌이키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몇사람 때문에 주님의 엄청난 은혜가 임했다. 몇 명 때문에 전부가 살았다하는 이름으로 사데교회가 이름이 났는데 말씀으로 영적 엑스레이를 찍어 볼때에 건강해보였던 겉모습과 달리 몇 달 못사는 암을 진단받듯이 영적암이 진단되어지는 것이다. 영적 MRI를 찍는 심정으로 주님앞에 진단받아야 되겠는데 2절에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것을 굳게하라는 것이다. 일깨워는 헬라어로 일어나라는 소리이다 일어나라는 소리는 현재 잠을 자고 있다는 소리이다. 우리들이 예배중에 몸은 앉아있어도 말씀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영적깊은잠 세상잠을 자고 있을수 있다 잠을 자고 있다는 소리는 영적으로 받은것도 없고 성령의 능력의 잡힌것도 없고 영적 태만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찬양을 하고 있으면서도 찬양의 가사에 감동도 없고 찔림도 없고 아픔도 없고 도전도 없고 꾀꼬리 같은 소리로 노래는 하지만 마음에서는 전혀 고백과 상관없이 앉아잇는 것. 이것을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찬양할 때 살아있는 자는 가사가 신앙고백이 되어져서 눈물이 나고 감동이 되어지고 회개가 되어지고 영혼 심령 깊은 곳에서 잠자던 것들이 깨어나게 되어지고 앉았던 자가 일어나게 되어지고 움직이지 않았다가 움직이게 되어진다. 주님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시는 것은 주님의 터치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감동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그릇을 통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깨우는 데도 불구하고 심령가운데 복음과 상관이 없고 말씀에 전혀 감동도 없고 여전히 외모만 화려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속에 생명의 시간을 잊어버리는자 되기 말라는 것이다. 외적으로 풍요하고 화려하면 그것을 너무 선망하면서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고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죽은자인지 살은자인지 이전에 살았다하는 이전의 이름은 가졌으나 직분가지고 남용하여 죽은자가 되어져서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는 심령은 아닌지 봐야된다. 죽은 신앙가지고 심판대에 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젓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 땅으로 인도해가셨다. 그 약속을 다 받았다 할지라도 들어간 사람은 두명밖에 안나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으로 장자총회의 말씀을 다 받았다. 받았다고 이룬것이 아니다. 이루고 들어가야 된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된다. 약속을 받기전에 내가 어떻게 해야 될것인가? 은혜로 주신 이 길은 좁은길이고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면 안되는 길이고 내가 죽지 않고는 못가는 길이고 나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못가는 길이고 은혜로 거져주신 길이라 할지라도 내가 철저하게 값을 치러야 가는 길이지 약속받았다고 거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된다. 우리의 삶을 지금 보고 계신다.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나는 어떠한가? 냉철하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고 육 있을동안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나를 향햐여 오늘도 말씀의 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말씀의검으로 내안에 금강석 처럼 굳어있는 암덩어리를 도려내고 죽은 세포가 살아 나고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망령되이 일컫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않기를 원합니다 멸망중에도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듯이 책망밖에 없는 사데 교회안에도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믿음을 굳게 지킨 흰옷 입은 자가 있듯이 말씀을 듣는귀가 열려서 회개하고 믿음의 행적을 따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 구원의 열매가 있는 한주간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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