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분 | 구인희 | 2016-0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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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헛된 인생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계시가 됬다는 것이다. 계시되었기 때문에 오늘을 감사함으로 살아야 된다. 왜냐하면 오늘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견대로 선택의 여지가 있는것이 아니라 오늘에 순종하고 감당하고 가는 것이 나의 구원에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삶을 허락하여 주셨다. 더 이상 자아에 욕심을 부리게 되어지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어진다. 사망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것이다. 자기 절대아로 산다면 흙으로 돌아가고 멸망의 길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안에 예수밖에 남는것이 없다. 주를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산것 밖에는 하나님 나라에 가져갈것이 없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결론을 낸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할때에 “제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 마지막 심판대에 충성된 종아 잘했다 칭찬받을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길 원하여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지켜 행하여 온전한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라고 하신다. 육이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지켜서 사람의 본분을 다한다 할지라도 육은 육이지 육은 영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육이다. 귀한 직분을 가지고 주님앞에 충성을 다하고 나만큼 충성하고 나만큼 믿음있는 사람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자기소견을 들고오는 자가 있다. 오늘 우리들에게 질서를 세워놓으시고 질서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복이 임한다. 그런데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소견대로 간다면 아직까지 그 심령가운데 창조의 역사를 영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질서를 통하여서 내려오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질서를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자식이 부모의 말을 양떼가 목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복의 기회를 주기 원하여 기도를 다하고 하나님앞에 얻은 지혜를 통하여서 어떤 일을 제공해줘도 하지 않는다. 불평을 하고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자기소견대로 간다. 천국은 자기소견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 그래서 우리를 순종하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모든 환경을 통하여서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 인간의 한계가 영으로 오신 예수님앞에 꼬꾸라지는 것이 구원의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질서를 주시고 질서에 순종할수 있는 상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수 없게끔 만드는 상황을 주신다. 열 번을 생각해도 내 소견이 옳은 것 같은 상황을 주신다. 이것을 하나님이 시험대에 놓으시고 인간의 가치로는 순종할수 없는데 부인하고 순종할 때 구원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 구원의 비밀이다. 육은 하나님을 경외할수도 없고 하나님을 섬길수도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할수 없을뿐더러 육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놓고 상황에 따라 생색을 내고 자기소견의 길을 가는 것이 육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수 없고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이뤄 구원의 본분을 다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영으로 건너가야 된다. 바람과 같은 성령으로 우리안에서 역사하실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내려놓고 포기해야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신 예수님밖에 없다. 우리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경외를 할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은 주님이 내안에 오셔서 나의 주권자가 되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를 온전히 통치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전도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너를 포기하라 너를 부인하라는 것이 전도서의 결론이다. 자신을 챙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옳고 내 방법이 옳고 내 자존심이 중요한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삶에서 자신의 것을 구축하게 되어지면 하나님은 부재중인 삶이 되어지는 것이다.
육으로 믿는자를 볼때 사울을 생각하게 된다. 기분이 좋고 자기감정에 취하면 주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고 살것같다. 그런데 자기감정이 안좋으면 금방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일을 거부한다. 말씀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거부하는 자리에 들어간다. 이것은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육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증거만 받고 믿기는 믿는데 육으로 믿기 때문에 육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할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우리는 할수없음을 아는 것이 전도서이다. 우리는 컨디션에 때라 오르락내리락한다. 다윗은 사울과 같이 동일한 예수를 믿었지만 다윗은 날마다 회개하는 영이 역사했다. 부딪히는 것마다 말씀을 보면서 침상을 적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상한심령으로 주님을 의지했다. 상한 심령으로 회개할때마다 주님이 찾아와 주셨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앞에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가다 보니까 예수를 낳는 조상이 됬다. 하나님은 자복하는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것이지 스스로 감정에 취해서 자기 육으로 예수믿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원함밖에 없는 육인데 어떻게 인간이 신의 원함을 행할수 있겠는가? 육이 신의 원함을 쫓아갈려고 하니까 지칠것 밖에 없다. 신앙생활을 해도 너무나 수고하고 무거운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앞에 구원의 세계로 넘어갈수 있는 것은 상한심령이 되는 길만이 살아갈길이 없다. 나는 할 수 없고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내 자아, 자기절대성으로 자기소견으로 강한 이 자를 결박하여 주셔서 무지갱으로 넘어가게 도와주시고 주의 성령께서 지혜주시고 내입을 통해서 나타나시고 역사하시고 한편 강도가 되어져서 주님 나라 이를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나를 이 악에서 건져달라고 나의 소견에서 구원시켜달라고 기도 드릴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인것을 아는자가 되기를 바란다.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고 심판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거쳐야된다. 감춰진 모든 것, 해아래의 모든 삶이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바울은 말씀을 들을때마다 심판을 받으면서 로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하면서 탄식을 했다. 살려달라고 탄식할 때 주의 영이 임했고 사망의 덫에서 건져냄을 받았다. 주님이 우리안에 계시면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생명얻는 존재가 되어진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살때에 믿음장에 올랐던 영장들처럼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본성을 이기는 역사가 일어나려면 말씀밖에 없다. 무슨일이 있어도 내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틀리는데 내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서 구원의 세계를 열고 가다보면 영육간에 축복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주어진 인생가운데 모든 일에는 기한과 때가 있다. 기한과 때를 통해서 모든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무익한 수고를 반복하는 인생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기한과 때를 통해서 행하시는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하게 위함이라는 것이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가운데 기뻐하는 날도 주시고 곤고한 날도 주셨는가? 두가지를 병행하여서 사람이 장래일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오늘을 잘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주님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을때에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 원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 지혜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로 만물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만물을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위의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신것은 보내신이의 때에 맞는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세워주신줄 믿습니다. 영광중에 세움을 받기 원한다면 때에 맞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잘감당하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육체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사는자가 아니라 육체의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던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진노의 자녀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셨는데 우매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면서도 진노의 자녀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가운데 곤고한 날을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우매자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고 곤고한 날에서 구원해 주시면서 순종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지혜자가 되게 하여주신다. 우리는 이땅을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나그네이다. 그림자에 불과한 유한한 인생에 스스로 허리가 굽어진 것을 펼 수 없고 스스로 지나온 세월에 통회한다 할지라도 헛수고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오늘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앞에 우리가 할수잇는 것은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일밖에 없는줄 믿습니다. 이것이 지혜자의 삶이다. 전도서를 마감하면서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 오직 내가 죽고 내안에 주가 있는것이다. 죽는 방법을 66권 전체를 통해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 삶속에서 여전히 자기소견대로 주님의 손길을 저버리고 거역하고 구원의 세계를 놓치고 사망의 강에서 건너지못하면서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우매자이기 때문에 회개할지 모르는 것이 우리믿음의 현주소이다. 내가 수없이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고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무엇이 훼방하는 것인지 모른다. 복달라고 구하면서도 복의 기회를 주셔도 복의기회를 때를 놓친것도 모르고 뿌리친것에 대해서 회개할줄도 모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진노의 자녀중에서 건너지 못하고 눈이 열리지 못한 증거이다. 이런 허망한것 대적하는 것에서 후패되고 내안에서 영의세계가 날마다 새롭게 되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분별하는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다. 평생동안 성전뜰을 밟고 다니면서 예배자라 할지라고 결정적인 때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창조의 사역을 거부하는 악중에 악으로 들어가면서도 악인지도 몰랐던 무지한 우리들에게 전도서를 통해서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목적이 우리들에게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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