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입니다 | 허사라 | 2017-0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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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평가하실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심령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 그런데 굉장히 부요해서 정말로 주님이 함께하시는것 같고 주님 앞에 축복받은것도 많은것 같도 근심걱정없이 일평생을 신앙생활을 했던 라오디아 교회에 이제 주님께서 그들을 평가하신다. 그런데 이 라오디아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주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라오디아 교회처럼 봉사한다. 직분을 가졌다. 오래 믿었다. 또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은 주님의 뜻을 몰랐다. 주님이 누구신지도 몰랐다. 주님이 내게 지금 우리 교회에 무었을 원하시는지를 몰랐다. 주님 앞에 빛 비췸을 받으면서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사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몰랐다.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몰랐다. 흑암의 권세에서 자유함 받아서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에 양육을 받으면서 어디로 들어가냐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성을 향해서 빛의 세계를 따라서 들어가는 빛의 나라는 빛이 길이다. 말씀이 길이다. 그런데 말씀과 상관없이 가는 정말 토해서 내치고 싶을 정도로 이런 심령을 가진 교회가 라오디아 교회라는 것이다. 일곱개 교회에 서신이 씌여질 당시에 교회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안밖으로 있었다. 외부에는 로마 제국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오늘도 우리는 이 황제 숭배를 강요받는다. 돈 없으면 못살고 남 누리느거 누리지도 못하고 돈 안 벌어온다고 탓하는게 황제 숭배하는거 강요하는것과 똑 같은 것이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동족 유대인들의 박해로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출회시켰다. 이단의 괴수. 신성모독하는 사람을 믿는다고 배교당했다. 이때 당시에 배교는 그냥 멸망 당한 자로 내치는 것이다. 그들이 멸망이라면 멸망인 것이다. 그래서 생명책에 지워질 자로 의인의 반열에 들어서지도 못할자로 저주를 하고 배도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 임하기를 원하는 그들이 착각했던것이 심중재림 보다는 우주적인 재림이였다.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시킬 주님을 소망해야 되는데 내 안에는 천국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고난을 지금 이겨내고 있는데 재림이 더디 되는것에 대하여 하나 둘 자꾸 낙오되면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발 맟추어서 네로의 핍박은 점점 심해져서 자기 정책을 기독교인 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기독교 인들이 불 태웠다고 하형을 당하고 굶주린 사자 밥이 되게 하고 칼로 추극을 당하고 이럴때에 신앙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점점 로마 제국과 타협하게 되여지고 우상 숭배로 타락하게 되여지고 교회의 핍박은 점점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서머나 교회에 고난이 오기 시작한다. 고난을 받는데 고난중에서도 주님을 만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고난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는 버가모 교회처럼 발람의 교훈을 쫓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똑같은 환경을 주셔도 이 고난을 통해서 정말로 주님 앞에 칭찬받는 자로. 오히려 그 고난으로인하여 영의 사람으로 변화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고난을 통해서 변질이 되여져서 세상과 타협하여 주님 앞에 죽은 자로 칭함을 받는 자리로 들어가는 자도 있다. 서머나 교회에 들어가서 정말로 남은 자가 되고 이긴 자가 되여야 하는데 고난을 피해서 세상과 결탁하게 되여지면서 발람의 교훈을 쫗게 되여진다. 뇌물에 좋고 음난에 좋고 점점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 변질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어디까지 가냐면 하나님의 나라도 통치하려고 하는 이세벨의 고백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시 사데교회로 죽은자의 교회로 돌아 오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자기 법이 법인 것이다. 사데교회 죽은자의 교회까지 오더니 이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칭찬받는 남은 자로 돠는 것이다 그러더니 두아디라 교회에는 어떻게 오냐하면 모든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하는것 같고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는것 같은데 실상 이 사람은 주님을 모르는. 주님과 상관 없이 자기 열심으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럴때 주님께서 뭐라고 나타나시냐면 나는 아멘이요.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로 찾아 오신다. 말씀으로 환경 앞에 아멘이신이로 찾아올때에 예수님도 한가지로 영광의 본체를 내려 놓으시고 이 땅에 보잘것 없는 여자의 자궁속에 그 캄캄한 곳에 티끌의 모양으로 낮아져서 더 이상 낮아 질래야 낮아질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는데 보냄을 받을때도 아멘했다. 비천한 환경가운데서 한가지로 아비없는 가장이 되여서 목수로 있으면서 천대를 받고 이러면서도 한가지로 삼십년을 아멘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그 길을 가게 하실때 온갖 핍박과 온갖 모욕을 다 당하면서도 항상 아멘 하셨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어떤 핍박이 되여도 아버지 옳소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아니고 미련하기 짝이 없고 보잘것 없는 자들이 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 올수 있게끔 길을 열어 놓으신것이 얼마든지 옳소이다. 아멘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평생 아멘만 하고 가셨던 그 길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시고 우리에게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도 아멘만 하시는 아멘으로 찾아오시는. 내가 너의 길이야. 내가 너의 진리야. 내가 너의 생명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너희의 막힌 담의 중보자가 되여서 내가 어떻게 가고 어떻게 왔는지 내가 너희에게 열어 놓은 이 길밖에 없어. 이러시면서 어떤 상황에도 아버지의 뜻을 쫓아 아멘이였다. 그 아멘이 우리의 아멘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 분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다. 어디를 가도 예수의 증인으로 우리가 살아야 되는것은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증인으로 사셨지 자기 이름을 내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은 창조의 근본이시라는 것이다. 창조가 그 분 없이는 창조되지 않은것이 없고 그 분을 인하여 만물이 지음을 받지 아니한것이 없고 지으신 그 창조물을 오늘도 붙들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신다. 그 창조물속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 그 분이 주인이시다. 이 라오디아 교회가 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주님앞에 토해낼수 밖에 없게끔 됐느냐? 라오디아의 뜻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군림하고 정복하는 의견들을 일반 사람들이 받아서 자기 의견대로 수렴하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이 되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고 만들어 주신 구원의 공동체는 사람의 의견이 필요 없다. 사람의 의견이 분변하면 타락하게 되고 차가워지는 라오디아 교회 같이 된다.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가 가문에도 노아로서 정말로 영혼들을 살려내는 폿대가 되여져야지. 이렇게 교회에 머무른것 같지만 타락하여 차가워진 교회. 비난하고 원망하다가 언제 이름도 없이 지워지는 교회. 이런 이름이 되지 말기를 원해서 이 말씀으로 처방받고 회복되기를 원한다. 무역이 왕성했던 이 교회가 영적인 풍요함도 있는것처럼 착각했다. 자기 만족 자기 기만이 회복의 기회를 거절한다는것이 아멘이 안된다. 이런 라오디아 교회에 인자이신 자신을 아멘으로 표현했다. 그냥 자기의 의가 표현되느라고 시끄럽고 강도의 굴혈. 귀신의 처소. 이것이 우주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심령가운데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하루 저녁에도 기와집을 열두번도 더 쌓고 요변을 떤다. 심령가운데서 귀신의 역사들이. 이것은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아서 그렇다. 그래서 보내신 일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충성된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겸손한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주님의 관심은 오직 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 한 사람한테 있다. 아멘이 진리라는 소리이다. 삶속에서 진리로 이루어지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멘이 우리의 길 되셔서 이끌어 가시고 아멘으로 모든것을 판단하시고 아멘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 들어야 될것이 아멘이요. 따라가야될것이 아멘이요. 나를 지으신 분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나아가야 한다. 아멘은 신뢰한다는 뜻이다. 믿고 있다는 뜻이다. 진실로라는 참이라는 뜻이다.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주신 그 말씀을 내가 동의한다. 내가 믿는다. 이것이 신약에 129 번이나 나오는 것이다. 신명기 27장14절~26절보면 레위 제사장이 범죄에 대하여 열거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했다. 잘못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자기 표현을 했지만 은혜로 나를 주장하셔서 율법이 완성되여지는 그 분이 나의 통치자가 되여지기 전에는 나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법을 도저히 지킬수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자기 죄를 드러나게 밖에 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말씀 앞에도 아멘입니다. 내가 저주받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결단에서 표현이 아멘이 였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의 영성이 아멘이다. 내가 나를 증언하려 하지말고 묵묵히 삶에서 감당하고 나면 자식들이 증언하고 공동체에서 증언해준다. 아멘의 삶이 되여야 되는것은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니까 아멘입니다. 너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될것이라. 아멘입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많을 것이라. 아멘입니다. 히브리 기자가 보지 못했으면서 본것처럼 받지 못했으면서 받은것처럼 순종하고 갔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수밖에 없었구나는것을 깨닫게되니 히브리서에 기록을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믿음을 의로 여겼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보면 아멘할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받아 들였다. 이것을 언제 증언하냐면 4천년이 지난후에.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몰라준다고 아우성이다. 이삭도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나 애급으로 양식을 구하려 가려하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하신다. 안 떠나면 죽을것 같은데 조금씩 조금씩 넘어가다가 그랄 땅에 머물게 되였다. 거기서 농사 지으면서 우물만 파면 블레셋이 빼앗고 파면 빼앗고 이러는데도 상종치 못할 사람들만 있고 들려오는 소리는 애급의 풍성함만 들려오는데 하나님이 떠나지 말라는 그 말씀하나 붙잡고 현실을 넘었다. 아멘으로 있었더니 그 해 백배의 축복으로 상상도 못할 역사가 일어난 이것이 아멘의 신앙이다. 아멘으로 따라가는 길을 열어 놓으실려고 그들에게 발 붙일 곳도 없게 만드시고 사람으로서는 가히 감당치 못할 기근도 만나게 하시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처방하시는것은 순종할수 없는것을 처방하신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열어 놓으신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열어 놓으신것이다. 예레미야 28장에도 시드기야가 유다를 다스린지 4년이 되였다. 이 유다백성들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돈 사랑하니 세상에서 끊어내려고 바벨론에 포로로 가게한다. 그렇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 했는데도 불구하고 시드기야가 그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서 바벨론을 치려하다가 눈 뺏기고 결박해서 집승 끌려 가듯이 가고 자식들도 자기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는것이 살길이였다. 종살이 잘하는 것이 살 길이였다. 그런데 아멘 안 했다. 결국에는 눈 뺏기고 수치스럽고 치욕스럽게 죽어지는것이 아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1장 7절에도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령을 하든지 너는 말하라고 하셨다. 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복만 빌어주는 선지자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교만하고 강퍅한 유다 백성들에게 가서 재앙을 선포하하는 것이다. 그대로 선포할때에 사람들도 싫어하고 듣지도 않고 . 그러니 선지자로서 보냄을 받아서 주님이 말하라는대로 하니까 너무 슬퍼서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가서 빨리 회복되는 멧세지를 주었으면 좋겠는데 기근과 온갖 고난의 멧세지를 전하게 하였다. 호세아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행음하니까 음탕한 여인을 얻게하여 툭하면 나가서 딴 남자의 아이 안고오고 또 데려오고 또 데려오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아서 가긴 가지만 이런 역할처럼 힘든 역할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이 거부하는 멧세지를 눈물로 전달했는데 결국에는 그들이 들은것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도로 쳐서 죽엿다. 이렇게 패역하다. 어깨에 멍에를 메고 다니면서 멸망을 예언했다. 너희가 지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멸망할수밖에 없다는것을 몸으로 보여주면서 21년동안 했지만 이들이 회개치 않고 원망하다가 다 죽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교만하고 잘 났는가? 뭐가 그렇게 순종하지 못하는가? 이스라엘이 초토화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때가 돠매 일진 이진으로 이스라엘로 보내시는데 삼차 느혜미야에게 감동을 주셔서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하신다. 에스라를 통해서 율법을 낭독하게 한다. 우리가 범죄한것이 아멘입니다. 열조의 죄악에 대해서 낭독해도 아멘입니다 이것이 우릭가 따라 가야될 아멘이다. 살아가야될 아멘이 있다. 영광의 본체이시나 낮아져서 가장 작은 티끌로 낮아져도 아멘 하셨다. 아담이 불 순종하여 죽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리는 여으로 아멘으로 생명주는 역사가 일어날줄 믿는다. 이것이 산자의 증거이다. 산자의 증거는 고난 가운데 순종을 배웠다 한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아멘했다. 이것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가운데 순종함을 배워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이것이 아멘으로 이루어진 축복이다. 육신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신다. 눈물로서 고난에 순종하므로 온전한것을 배웠다 한다. 이래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들어갈수 있는 것이 순종하고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 찾으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사환으로 충성했고 예수님은 아들로서 충성을 했다 . 계시록 2장 10절에는 너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고난을 통하여서 너희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다. 온전히 순종하고 앞만 보고 가는 충성. 예수님은 자기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알아 이러셨다. 예수님은 진리의 증인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를 든다면 에녹이 있다. 타락한 사람들에 대해서 증거할때 눈믈로 간청하고 탄원한다.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아는 에녹이기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의 때를 예언하면서 유다서에 에녹을 증언한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코드가 하나님 앞에 맞춰져 있다. 아멘이시요. 참되신 증인으로 오신 창조의 근원이신 분으로 오셔서 주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뜻이 이루어질것이라는 것을 믿고 주님이 끝내셔야 된다는 것을 알고 아멘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알파와 오메가 의 하나님으로 시작과 끝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실때 아멘입니다. 덥든지 차든지하라 .아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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